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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츠쿠로] 빛의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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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앙스타
작성자admin
작성일2018.08.27
조회143

주의사항::

본 글은 18.08.25에 열린 테츠쿠로 교류회

좌백호우청룡에 발간된 책입니다.

본 내용은

『스카우트! 갱』 과 『스카우트! 권투의 사수』의

네타가 있을 수 있으며, 일부 대사의 차용이 있습니다

01

테토라는 메일을 보내려 핸드폰을 켰다가 문득 지난 메시지에 시선을 빼앗겼다.

「도착했슴다 대장, 어디심까.」

「동상 앞이다.」

「오늘 즐거웠슴다! 대장. 안녕히 주무십쇼.」

「그래, 테츠. 너도다.」

그 뒤로도 도착을 알리거나, 다음 약속을 잡거나 하는 단조로운 대화의 반복이었지만 지난 봄방학 동안 쿠로와의 일이 떠올라 괜스레 웃음이 피어났다.

아니, 정정. 별다른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별 목적 없이 만나서 거리를 걷거나, 영화를 보거나 게임센터를 가거나 식사를 했다. 조금쯤은 데이트 같았을까, 사람들에게 연인처럼 보였을까? 혹시라도, 대장도 그렇게 여겼을까? 테토라는 자연스레 입 꼬리가 올라갔다.

『좋은 아침임다, 대장! 테츠임다. 벌써 새 학기라니 믿기지가 않슴다. 대장이 없는 교정은 왠지 쓸쓸함다. 대장을 매일 같이 볼 수 있었던 봄방학이 그립슴다.』

키류와 처음으로 데이트 아닌 데이트 같은 약속을 잡게 된 건 가라데부의 마지막 연습 날이었다. 운동부의 3학년들은 대체로 대회가 끝나면 은퇴했지만 쿠로는 종종 얼굴을 비춰왔다. 수험을 보지 않는 게 가장 큰 이유였으리라. 물론 자주 오던 것도 아니었고 오랜 시간 있다가 가던 것도 아니었지만 대장과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을 수 있어 행복했다.

졸업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기 전까지는 말이다.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데 까지 생각이 미치자 테토라는 마음이 진창에 처박힌 것만 같았다. 사실 정말로 처박힌 건 마음이 아니라 몸이었지만. 방심을 한 사이에 쿠로의 날카로운 하이킥이 테토라의 머리에 날아왔고, 테토라는 턱, 하고 큰소리를 내며 매트에 몸을 부딪혔다. 물론 키류는 킥이 테토라의 머리에 닿기 전에 힘을 줄였기 때문에 크게 아프지는 않았지만, 테토라는 매트에 누워 일어날 줄을 몰랐다.

“대련 중에 딴 생각이라니 여유 있잖나, 테츠”

“……. 졸업하시면 대장은 데뷔 준비를 하시느라 바쁘시겠죠.”

도발하는 듯 했지만 어쩐지 즐거움이 묻어나는 쿠로의 목소리를 듣자 테토라는 투정 같은 말이 흘러나오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이건 정말 어쩔 수 없었다. 타오르는 노을이 깔린 부실에서, 선명한 색채에도 지지 않는 존재감을 가진 사람, 심지어 그간 뒤를 쫓고 또 쫓았던 남자와 단둘이 있게 된다면 누구라도 그러지 않았을까.

테토라의 투정에 키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렇다면, 주말에 보겠냐고 했다. 노을빛이 드리워진 키류의 얼굴도 저처럼 쓸쓸해 보였다.

『그렇지만 언제까지고 침울하게 있을 수는 없잖슴까. 유성대도, 가라데부도 두 대장에게 지지 않도록 잘 해 보이겠습니다. 대장의 자랑이 될 수 있도록 말임다.』

영화를 보다 고개를 돌려보면 자신을 바라보는 쿠로와 눈이 마주치곤 했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려다 멈칫하던 키류의 손이, 무언갈 말하려 열렸다 다무는 입이 테토라를 기대하게 했다. 대장도 자신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그랬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슬그머니 머리를 들었지만 테토라는 왠지 겁이 나서 주춤했다. 어렴풋하지만 분명하게 키류를 향하는 그 마음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지 고민하며 어물거리는 사이에 개학을 해버려서 테토라는 꽤 속이 끓었다. 동경만은 아니었다. 좋아는 너무 작았다. 사랑은 너무 낯간지러웠다. 하지만 언젠가 전하리라, 그렇게 마음먹었다.

『그때가 온다면, 저, 대장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슴다.』

마음 같아선 지금이라도 고백하고 그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메일로 고백하는 건 남자답지 못하다. 테토라는 그렇게 스스로를 타이르며 예고 같은 말로 메일을 맺었다.

멀리서 친구들이 부르는 소리에 테토라는 망설임 없이 송신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뛰었다. 메일의 답장이 언제 올지 신경 쓰여 하루 종일 집중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테토라는 키류 쿠로에게 고백하지 못했다. 그보다는 메일에 답장조차 오지 않았다. TV방송 그 어디에서도 그는 보이지 않았고, 졸업생들 중에 그 누구도 키류의 행방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다. 실례를 무릅쓰고 집으로 찾아갔지만 텅 빈 집만이 테토라를 맞이했다. 그렇게 키류 쿠로는 나구모 테토라 앞에서 사라졌다.

02

“나구모 테토라의 이상형은 가사 전반이 능숙한 사람!”

진행자는 패널의 스티커를 뜯으며 외쳤다. 패널의 제일 위쪽엔 '멤버가 알려준다, ㅇㅇ의 이상형!' 이라 적혀있었다. 진행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호응을 유도하는 스태프에 손짓에 방청석에서는 순식간에 '에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데뷔 2년차의 꽤나 인기 몰이를 하고 있는 남성 아이돌 그룹의 센터, 나구모 테토라는 당황한 듯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헤에. 나구모군 여성적인 사람이 취향이였구나.”

“가정적인 것을 여성적이나 남성적이라고 하는 게 아님다. 그냥……. 제가 그런 게 서툴러서 상대는 잘 하는 사람이었음 하는 거 뿐임다.”

“아, 그리고 이 녀석 붉은 머리 좋아해요.”

“아아! 멤버로부터 폭탄발언!”

진행자의 말이 끝나자마 마자 멤버들은 테토라의 이상형에 대해 기세 좋게 떠들기 시작했다.

“키가 큰사람이 좋다고 한 적이…….”

“일전에 강한 사람이 멋지다고. 유단자라거나.”

“종합하자면 빨간 머리에 집안일을 잘하고 키가 크고 유단자?”

“이거 이상형이 아닌데. 절대로 이상형 아냐”

“우리 집 꼬맹이가 7살인데 이상형을 물으면 파워레인져의 레드라고 대답한다고. 우리 집 꼬맹이랑 같은 수준이냐?”

“우왓, 다들 제 이상형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계심까. 스토커 이심까?”

테토라의 말을 마지막으로 스튜디오에선 하나 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언뜻 보면 해프닝 같지만 사실은 모두 사전에 합의된 대본이었다.

컷, 좋습니다. 잠시 쉬었다 갑시다. 감독의 소리에 따라 대기 하고 있던 스타일리스트들이 분주해졌다. 저마다 한 아름씩 도구를 들고 와 메이크업 수정을 해 주고 있었다. 나구모 테토라는 익숙하게 그 손길에 얼굴을 맡기며 물을 마시고 있었다.

계획된 토크, 적절한 타이밍에 스텝에 지시에 맞춰 추임새를 넣는 방청객, 화면에 간신히 나오지 않을 만큼 들려있는 마이크, 밖은 이미 해가 떨어진 저녁인데 한 낮처럼 만들어주는 조명, 그리고 그들의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촬영하는 카메라까지. 스튜디오를 채우는 그 모든 것들이 이제 나구모 테토라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것들이었다.

*

“위하여~”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를 건배사를 외쳤다. 작은 술집 하나를 통으로 빌려 하고 있는 작은 회식이었다. 몇 시간이나 이어진 술자리에 테토라도 거나하게 마시고 있는 중이였다. 평소보다 많이 마시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얼굴이 벌게진 것 말고는 취하지 않은 것 같았다. 물론 눈앞의 안주가 도망간다거나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잔상이 보여서 스스로가 초능력자처럼 느껴지는 것만 빼면 말이다.

그때쯤 한 남자가 술잔을 들고 테토라의 옆에 앉았다.

“그래서, 나구모군 만나는 사람 진짜 아무도 없는 거야?”

아, 그러니까 진행을 맡았던, 마사히토…씨? 테토라는 술이 덜 깬 머릿속에서 이름을 끄집어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대답이 늦어지자 '있다'는 암시로 생각했는지 남자는 의뭉스럽게 웃으며 테토라의 옆을 쿡쿡 찔렀다.

“오프더레코드로 해줄 테니까.”

“아이돌이 만나길 누굴 만남까. 없슴다, 없어요. 진짜임다.”

“그렇게 말하면 다들 뭔가 있던데, 테토라군 이상형 방송용으로 치기엔 너무 디테일했다고. 실제로, 있는 거 아냐? 이거?”

남자는 주먹을 쥔 채로 새끼손가락만 펴 흔들며 웃고 있었다. 경박스러운 그의 웃음 밑에는 번들거리는 욕망이 깔려있었다. 테토라는 께름칙한 기분에 순식간에 술기운이 달아났다.

“그게 진짜면 방송에서 썼겠슴까?”

조금 집요한데. 더 이상 얼버무리기 어려워져 주변에 sos신호를 보내듯 시선을 돌렸다. 건너 테이블에 앉아있던 매니저가 테토라의 신호를 느낀 듯 자신의 잔을 들고 둘 사이에 끼어 앉았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고 계십니까? 저도 끼워주시죠.”

“아, 나구모군 '이거' 이야기 하고 있었지.”

남자는 여전히 손가락을 흔들며 웃었다.

“엇, 테토라군 여자가 있는 거야? 매니저이면서 아는 게 없는데?”

“제대로 알고 계신 거 맞슴다. 없슴다, 없어요.”

매니저는 너무 취해 보인다며, 바람 쐬며 술 좀 깨고 오라며 테토라의 어깨를 툭툭 쳤다. 형 고맙슴다. 테토라는 마음속으로 감사인사를 하며 테토라는 떠밀리는 척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통수에 꽂히는 시선이 제법 따가웠지만 테토라는 끝까지 모른 척 하며 도망쳤다. 너무 강하게 부정하고 자리에서 일어선 게 오히려 숨기는 걸로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매니저인 타나카씨가 잘 해결해주길 비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나 저기나 다들 술잔을 들고 마시는 통에 적당히 끼어 앉을만한 곳도 없어서 테토라는 술집의 뒷문으로 나왔다. 조금 걷고 싶은걸. 하지만 취한 채 인파속에 갇히게 되는 것도 싫어 테토라는 어두운 뒷골목을 한참 둘러봤다. 다행히도 문 근처에는 버려진 낡은 의자가 있었다. 의자의 쿠션 부분이 내려앉았지만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의자뿐만이 아니라 손잡이가 휜 조리도구나, 부서진 테이블도 여럿 있었다. 버려진 것들에 둘러싸여서야 테토라는 조금 편안했다.

술잔을 들고 흔들던 마사히토의 웃음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몇 년간의 연예계 생활을 하며 쌓은 '촉'은 안 좋음을 가리키고 있었다. 자신을 이용하려던 사람들은 그렇게 웃었다. 치아가 보이고 눈초리가 떨릴 만큼 웃으며, 어딘가 경직되어 있는 눈동자로는 테토라의 약점을 찾기 위해 재빠르게 움직이곤 했다.

뭔가 소문이 난거려니. 최근이라면, 유이와의 일인가. 테토라는 기억을 되짚어 봤다. 그때 익숙한 문자 착신음이 들려왔다. 매니저였다. ‘아슬아슬 세이프였어. 마사히토씨, 술 먹인 뒤에 정보를 캐서 주간지에 판다는 이야기가 있거든. 야쿠자 쪽에 끈이 있다는 소문이 있어서 다들 쉬쉬하는데. 하야구치였나, 그런 이름이었어. 테토라군 거짓말 같은 거 못하니까, 조심해.’

설마 했던 게 맞았던 거다. 테토라는 맥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유이와는 지난번 드라마를 함께 찍었던 동료에게서 소개를 받았다. 처음부터 그쪽에서 테토라에게 관심이 있어 다리를 놓아 달라 했다고 했다. 자신보다 두 살이나 어림에도 불구하고 나이에 걸맞지 않게 어른스럽다가도, 마스크에 안경이니 모자니 잔뜩 쓰고 놀러간 게임센터에서 테토라를 이기고 만면의 웃음을 짓는 모습도 있었다. 그녀와 제법 그럴듯한 분위기도 몇 번 있긴 했지만, 테토라는 한 발작을 더 나아가지 못한 채 그녀와 오빠동생으로만 지내고 있었다. 아이돌은 연애 금지니까, 라면서 에둘러 한 거절을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지 못했다. 이대로 이 인연도 끊어질 것임엔 자명했다. 차라리 그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간의 테토라의 연애는 이런 식이었다. 어쩌다가 분위기에 떠밀리듯 사귀게 되어도, 얼마 가지 않아 상대로부터 나를 정말 좋아하긴 하는 거냐며 차이기 일쑤였다. 원인은 알고 있다.

대장. 테토라는 술김에 작게 읊조렸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다. 그리움에 기운 마음은 어지러울 만큼 휘청거렸다.

해소되지 못한 마음은 몇 년간 그를 맴돌았다. 나구모 테토라가 할 수 있는 것은 못 본 척 묻어두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눈물이 차면, 젖어 무른 땅에서 묻어놓은 것들이 밀려 올라오듯 그를 떠올리기만 해도 지난 미련들이 고개를 드밀었다. 미련이 너무 많아 덮어놓고 사랑할 수도, 없던 것처럼 잊을 수도, 마냥 미워할 수도 없었다.

**

테토라가 속한 소속사는 업계에서는 중간정도의 규모의 회사로, 소속 연예인이 많은 편이 아니다보니 서로 교류가 잦았다. 일이 없는 날에도 사무실에 와서 서로 연습을 봐주거나, 잡담을 하는 일이 많았고 테토라는 그런 사무실의 분위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스케줄이 없는 날에는 종종 회사에 나오곤 했다. 특히나 오늘처럼 앨범 활동이 끝물에 들어 여유가 있을 땐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은 유독 사무실에 사람이 없어 한적했다. 테토라는 누군가 오기를 기다리며 죽칠 요량으로 휴게실에 앉아 과자 하나를 뜯어 앞에 두고 TV를 틀었다.

『-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죽은 건 나고, 산 자는 그들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그렇듯 죽은 자의 정신은 산 자의 기억 속에-』

삑.

『-일은 맑겠으며, 며칠간 고기압의 영향으로-』

삑.

『-아직 조직 대 조직의 항쟁이라고 말할 단계는 아니라는 것이 경찰청의 설명입니다. 전문가들은 야쿠자 내부 분열-』

무료하게 채널을 넘기다가 문득 귀에 들려온 단어에 테토라는 채널을 이동하지 못한 채 TV에 집중했다. 요즘 왠지 야쿠자라는 단어와 자주 마주치는 것 같았다. 그때 이야기 들었던 단체 이름이 뭐였지? 하야구치구미였던가? 그의 일생에서 야쿠자와의 접점은 십대 때 즐겨보던 드라마 시리즈 정도가 다였을 텐데. 기분 나쁜 묘한 기시감에서 헤어날 수가 없어서 테토라는 연신 뒤척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핸드폰이 울린 건 그때쯤 이었다.

나쁜 짓을 하다 들킨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가,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핸드폰을 떨어트릴 뻔 했다. 액정에는 유이라는 이름이 반짝이고 있었다. 통화버튼을 누르기 까지는 꽤나 용기가 필요했다.

어색하게 안부를 묻곤 지옥 같은 침묵이 흘렀다. 뭐라도 말해야 하는 건가? 테토라가 갈등에 휩싸일 무렵 어렵사리 말문을 뗀 그녀에게서는 정말 예상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저도 이 이야기를 얼마 전에 들었는데 나구모씨와 저, 지난번 만났을 때 사진을 찍혔나 봐요. 기사화 하고 싶지 않다면 돈을 내라고 회사 측에 압력이 있었대요.”

조용히 이야기 하고 싶어서 호텔에서 만난 게 찍힌 듯 했다. 하늘에 맹세코 그녀와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 하지만, 호텔에 드나든 사진이 찍혔다면 앞으로의 활동에 문제가 생길 것임엔 자명했다. 테토라는 미안함과 낭패감에 테토라는 작게 탄식했다. 그녀의 목소리를 좀 더 작아졌다.

“상대가 일반 기자나, 스토커 같은 게 아니라, 야쿠자라고 그랬어요. 하야구치구미였나, 저도 언뜻 들은 거라…”

하야구치구미? 테토라는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머리가 얼얼했다. 현실감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간의 일과 그녀의 말을 정리하면 그간 자신의 뒤를 캐고 있던 건 하야구치구미였다는 뜻이다. 야쿠자의 표적이 될 만큼, 뭔가 저지른 게 있었나?

하지만 기획사에 협박이 있었다면 테토라는 지금쯤 사장실에서 대판 깨지고 자숙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제까지도 분명, 사장님도 매니저도 별다른 이야기가 없었다. 직접 협박을 받았다는 그녀 쪽이 더 걱정되어 괜찮냐고 물으니 그녀는 담담히 괜찮다고만 답하면서 말을 이었다.

“회사는 상대가 야쿠자인데다, 아무래도 장소가 장소다보니까 돈을 내고 마무리를 짓자는 결론이 났었어요. 그런데 다음날에 갑자기 그쪽에서 카메라 째 주면서 물러나겠다고 했다는 거예요. 없던 일로 하자니. 갑작스럽게 그런 말을 해도 찜찜해지기만 하잖아요? 그런데 그 뒤로 정말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거에요.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혹시 모르니 나구모씨도 조심하세요. 이걸 말씀드리고 싶어서 연락드렸어요. 조금 더 일찍 연락드리고 싶었는데 핸드폰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서…”

테토라는 입 안이 썼다. 분명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어떤 종류의 징계를 받았으리라. 부러 마음을 써서 테토라에게 연락을 한 그녀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통화를 마쳤다.

물론 연예계에 있다 보면 쉽지 않게 야쿠자에 대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다. 여러모로 법이 개정되거나 만들어지면서 전통적인 야쿠자들의 자금줄-보호세를 명목으로 상가에서 돈을 받는 일이나 매춘알선이나 마약 판매 등-이 시원치 않아지자, 그들은 연예기획사를 운영했다. 심한 곳은 불법AV 제작과 유통에 손을 대지만, 간접적으로라도 연줄이 닿아 있는 곳들은 소속 배우나 가수를 착취하거나 스캔들을 이용해 한몫 챙긴다는 소문이 있었다.

자신도 유이도 상승세의 아이돌이고 둘의 스캔들은 꽤 비싼 값의 기사가 될 거라는 건 누가 봐도 자명했다. 사진도 있었고 실제로 협박까지 했으면서 중간에 물러났다니? 풀리지 않는 의문에 머리가 아파왔다.

“심각한 일 있냐? 핸드폰 잡고 뭘 그렇게 노려봐. 구멍 나겠다.”

갑작스레 말을 건 매니저 때문에 테토라는 입 밖으로 심장이 튀어 나갈 지경이었다.

“노,놀랐잖슴까. 인기척 좀 내십셔! 큼.크흠. 별거 아님다. 아니, 별게 아닌 게 아니라 별거는 맞지만…”

“왜 그렇게 횡설수설해?”

“혹시 저 스캔들이라거나, 뭔가 있었슴까?”

“뭐? 무슨 뜬금없는 소릴…설마, 너 진짜 사고라도 쳤냐? 그 유이였나, 그 여자 때문이야? 만나는 사이 아니라며.”

“그, 그럴 리가 있슴까? 그냥 지인이. 크흠, 네, 지인이 스캔들 기사를 빌미로 야쿠자에게 협박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말임다. 걱정돼서……. 그럴 땐 어떻게 되는 검까?”

“아”

테토라는 평정을 가장하려고 했지만 매니저의 짧은 탄식소리에 놀라 크게 움찔거렸다. 다행이도 매니저는 테토라를 지나쳐 테이블의 과자를 하나 집어 먹으며 옆에 앉았다.

“뭐, 흔한 일은 아닌데, 드문 일도 아냐. 보통은 돈을 내지. 상대가 야쿠자라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잖나. 우리 쪽은 아직까진 그런 일은 없었는데…”

기억을 되짚는 듯 잦아들던 매니저는 별안간 콧잔등을 찡그렸다. 이건 그의 오랜 습관 중에 하나인데, 긴 설교 전의 신호탄이었다. 테토라는 다른 종류의 긴장감이 들었다.

“어쨌든, 이번 앨범 성적도 좋아서 대표님도 기분 좋아 보이시니까 활동 마무리만 잘 하면 된다. 마지막에 사고치지 말고. 넌 그동안 스캔들 터진 게 하나도 없어서 기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으니까 더 조심해야해. 어쨌거나 누구 만나라면 사무실에 이야기는 제대로 해라. 여차하면 나도 감싸줄 수 없으니까, 잘하자. 알았어?”

“네, 넵”

아무래도 매니저의 반응을 보아하니 이쪽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 했다. 사실을 털어 놓고 상담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그러려면 그녀와의 일도 솔직히 해야 하는데, 회사에 알려져 괜스레 긁어 부스럼을 만들까 싶어져 테토라는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채 있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야쿠자에 대해 알 것 같은 사람도 주변에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테토라는 전화번호부를 뒤적였다.

상담 정도라면……. 그는 조심스레 '모리사와 치아키'의 번호를 눌렀다. 착신음을 들으며 나구모 테토라는 뭔가 알 것 같은 기분도 들었지만 머릿속이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해서 도무지 어떤 것도 알 수가 없었다.

03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나구모 테토라는 아이돌이었다. 그러니까, 경찰도 탐정도 아니었고, 폭력단과는 먼 삶을 살았으며, 언감생심 누구의 뒤를 캐는 일은 해본적도 없었다. 위험할걸 뻔히 알면서 다른 사람에게 부탁이나 의뢰를 할 수 있는 성품도 못됐고, 눈치가 좋거나 요령이 좋다거나 하다못해 운이 따르는 타입도 아니었다. 그러니 모리사와 치아키의 대답은 -테토라의 발상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차치하고- 나구모 테토라라는 사람을 안다면 당연히 나올만한 답이었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잊어버려.”

“하지만 리더. 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있고 싶진 않슴다.”

“네 말대로 미심쩍은 부분이 많지만 상대는 야쿠자다, 나구모. 잊는 게 안 되겠으면 회사에 이야기 하고 경찰의 도움을 받는 것이 순서다.”

정론이었다. 자신도 몇 번이나 했던 생각이었지만 다른 사람의 입에서 들으니 더 뜨끔했다. 하지만 테토라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보호만 받고 싶지가 않았다. 정말로 그랬다.

오기였다.

그래서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는 야쿠자에 대해 아는 것도 없었고, 그런 세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도 몰랐다. 몸담고 있는 사람? 테토라는 자신의 생각을 한 음절씩 되짚어 봤다. 기억속의 저편에서 편린이 솟았다. 마사히토씨. 그를 쫓다보면 뭐라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어둠속에서 환하게 빛나는 외길이 보이는 듯 했다. 나구모 테토라는 제법 괜찮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테토라는 마사히토를 미행하기 시작했다. 그도 연예인이었기 때문에 정보를 얻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를 쫓은 일 보다는 자신이 변장하는 게 더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는지, 마사히토는 한 밤중에 남들의 눈을 피해 집에서 나왔다.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라 마주칠 사람도 없을 텐데 검은 모자에 선글라스까지 쓰고 있었다. 저거, 앞이 보이긴 하는검까? 쓸데없는 의문을 지우며 테토라는 마사히토의 뒤를 쫓았다.

그가 도착한 곳은 한 유흥가였다. 한동안 통화를 하더니 곧이어 다른 남자가 나타났다. 테토라는 입이 바싹 말랐다. 아무렇게나 뒤로 넘긴 머리에 까무잡잡한 피부의 남자는 은색용이 수놓아져있는 검은 스카쟌을 입고 있었다. 목에 걸린 굵은 금목걸이나 건들거리며 걷는 폼이나 길을 가다 사람을 붙잡고 열 사람에게 물으면 열 사람 모두 야쿠자라고 할 만큼 전형적인 야쿠자의 모습이었다. 마사히토는 남자의 옷깃을 잡아 당겨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갔다.

“임마, 왜 아직도 돈 이야기가 없어? 나구모 테토라의 스캔들이라고. 그게 얼마짜리 정본줄이나 알아?”

테토라는 주먹을 꽉 쥐었다. 제대로 찾은 것이다.

“그게, 더 높은 곳에서 손 떼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높은 곳? 누구?”

“하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4대째랍니다.”

4대째? 그런 사람이 왜 자신을 위한 행동을 한 거지? 둘은 소리를 한층 낮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간신히 들려오던 소리가 들리지 않아 초조하게 한 발짝 다가가려고 할 때.

“그 이상은 위험하다, 나구모”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테토라는‘우와앗’하고 꼴사나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낯선 손이 자신의 입을 틀어막지 않았으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도쿄만임까? 역시 도쿄만이겠져? 테토라는 숫제 울 것 같은 기분으로 낮선 사람을 바라봤다. 쉿, 하는 소리를 내고 얼굴을 보인 이는 다름 아닌 모리사와 치아키였다.

*

“위험하니 그만 두라 하지 않았나.”

치아키의 자동차가 굉음을 내며 밤의 도로를 질주했다. 두 사람은 치아키의 집으로 향하고 있는 중이었다.

“리더는 제가 거기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슴까? 서, 설마…”

“음?”

“하야구치구미의 4대째라는 게 리더이심까?”

“음하하하하, 그거 참 재밌는 이야기구나! 나구모. 아쉽게도 틀렸다. 지난번에 내게 상담할 때 뭔가 위험한 걸 궁리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 요 며칠 보고 있었지”

치아키가 너무 시원하게 웃어 테토라는 머쓱하게 그를 바라봤다. 결국 미행하는 사람을 미행했다는 이야기다. 다른 사람이 봤다면 퍽이나 웃긴 광경이었을 것이다.

“4대째는 다른 사람이다. 너도 알만한.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나머지는 본인에게 듣도록”

테토라는 혼란스러운 마음창밖을 바라봤다. 차의 유리에 자신의 얼굴이 비쳐 보였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테토라는 자신이 진실에 다가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서는 아무것도 모르겠다. 치아키는 그런 테토라를 한번 쳐다보고 속도를 높였다.

모리사와 치아키는 목소리가 큰 사람이었고, 목소리보다 행동은 더 큰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술을 마시는 걸 좋아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곧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왁자지껄 떠들며 마시는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며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집에서 마시는 쪽을 선호 한다고 하면 상상이 안 된다며 고개를 젓곤 했다.

남들이야 어떻게 생각하던, 그는 꽤나 열심히 홈 바(bar)를 채워나가고 있었다. 작은 극단에서 단역을 하던 시절부터 꽤나 잘 나가는 배우가 된 지금까지도 꾸준히 하나씩 사 모은 술로 벽면을 채웠다. 이제 와서는 혼자서 마시기엔 너무 많은 양이었고, 그는 술을 마실 일이 생기면 꼭 한번쯤은 사람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곤 했다.

테토라는 치아키의 자랑인 바에 앉아있었다. 이전에도 몇 번 온 적이 있었지만 테토라는 조금도 진정하지 못하고 술잔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이제 곧 도착할거다. 테토라를 안정시키려는지 치아키는 말을 꺼냈다. 하지만 치아키도 긴장한건 마찬가지라 자리에 앉지 못하고 바 근처를 서성였다.

치아키의 집은 현관에서 거실까지 꽤 먼데다 바가 설치되어있는 발코니 근처는 코너에 막혀 현관이 바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멀리서 전자음이 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을 때 테토라는 튀어나가듯 일어났다. 그러나 그런 테토라를 제지고 자신이 데려 오겠다며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현관으로 발을 돌렸다.

**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거, 너도 알고 있지 않나?”

내 양손은 더럽혀 졌다고, 모리사와.”

“바보 녀석.”

“…….”

“나에겐 나구모도 너도 소중한 동료다. 동료가 상처 입는 것은 보고 싶지 않다.”


현관에서 언뜻 목소리가 들려올 때부터 테토라의 심장은 쿵쿵 울렸다. 치아키가 상대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지만, 테토라는 이미 모든 걸 눈치채버렸다. 문이 닫히고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가 났지만 한참이 지나도 상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자 걸음 소리가 들렸다. 조용하고 규칙적인 소리로 치아키는 아니었다. 상당히 단련된 사람의 것이었다. 가까워지는 발소리처럼 테토라의 심장은 점점 더 격하게 뛰었다. 귀가 웅웅거릴 지경이었다.

“탐정놀이는 끝이다.”

전에도 큰 키였는데, 더 큰 것 같았다. 몸에 잘 맞는 슈트는 그런 그의 키를 더 돋보이게 했다. 교복을 입을 때부터 옷의 태가 잘 살던 사람이었다. 기억속의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이 변한 것처럼 키류 쿠로의 모습에는 세월이 묻어났다.

대장, 대장.

“어린애 취급하지 마십셔.”

묻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말도 듣고 싶은 말도 많았을 텐데 꿈에 그리던 사람을 보게 되니 막상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보다시피……. 이런 사정이다.”

쿠로는 와이셔츠 단추를 풀어 가슴팍을 보였다. 용 문신이 언뜻 보였다. 그는 그 이상의 설명을 하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테토라도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저 자신 앞에 키류가 있다.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네 녀석 치고는 잘도 찾았군. 하지만 여기까지다. 알고 싶은걸 다 알아냈으니, 이젠 돌아가. 그리고 두 번 다시는 관여하지 마라.”

쿠로는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다시 현관으로 가려고 했다.

“대장. 저, 바보긴 해도 이제 이런 것에 속아 넘어가지 않슴다. 대장은 그렇게 제 앞에서 사라져 놓고 줄곧 절 보호해 오신검까?”

테토라의 말에 쿠로는 발을 멈췄다. 어떤 대꾸나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오히려 테토라는 어떤 종류의 확신을 얻었다.

“대장이 사라지고 쭉 대장을 찾았슴다. 한마디 이야기도 안 하고 사라질 정도로 제가 대장에게 무의미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때면, 너무 괴로웠슴다. 이젠 알겠슴다. 상관없는 녀석을 위해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은 없슴다. 대장은 절 좋아하는검까?”

쿠로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말이 없었다. 지나온 시간만큼 오랜 침묵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 너는 나를 좋아해선 안 된다.”

오랜 침묵이 끝에 나온 말은 긍정도 부정도 아니었다.

테토라는 처음엔 눈이 따가워 지는걸 느꼈다. 가슴께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숨을 삼키다보니 이윽고 목이 부운 것처럼 아파왔다. 여전히 그의 등만 바라보았다. 나구모 테토라는 이제야 키류 쿠로라는 사람을 보게 된 것 같다고, 그런 생각을 했다.

“테츠, 내겐 자격이 없어. 그럼에도 나는 질리지도 않고 다시…”

“전… 저도 대장을 좋아함다. 자격이라니 그런 건 저, 머리 나빠서 모르겠슴다. 그냥 좋아한다는 마음만으론 부족함까?”

키류 쿠로의 어깨가 살짝 흔들렸다.

흔들렸다. 그래, 흔들린 거다.

테토라의 목을 막고 있던 젖은 숨이 한 방울 흘러넘쳤다. 멈춰선 그의 등에 다가가 얼굴을 가만히 대었다. 자신에겐 한 번도 보여주지 않으려 했던 피투성이였을 그의 등. 그 등은 따뜻했다.

/ Epilogue.

남자는 작은 가게에 있었다.

크기가 작아 기계를 쓸 수 없는지 제 손의 반의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크기의 천을 들고 바늘을 놀리고 있었다. 힘들어 하는 기색 없이 깜짝할 새에 기계로 만든 것처럼 깔끔하게 모양을 잡아냈다. 꽃과 같은 모양의 작은 코사지였다. 남자는 진행과정을 체크하려는지 만든 코사지를 한쪽으로 치우며 책상에 올려둔 종이 다발을 들었다. 화려한 컨셉 그림 옆에는 빼곡하게 적힌 메모가 있었다.

남자의 네 번째 손가락은 한 마디 반쯤 짧았다. 그 때문인지 종이가 채 다 집히지 않아 한 장이 쑥 하고 작업대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종이를 집으려 허리를 숙였다. 문득 바라본 자신의 발밑은 어두웠다. 남자는 떨어트린 것을 집고 일어나는 대신, 바닥에 쪼그려 앉아 눈을 감아 옛 일을 떠올렸다.

예전부터 자신은 어리석었다. 그런 주제에 폭력 만큼에는 익숙했고 결국 주변을 망쳤다. 자기 자신도 예외는 없었다. 금이 가고 망가진 자신을 보이지 않으려고 자신을 밀랍으로 굳혀 평정을 가장 했던 때도 있었다.

자신을 동경한다던 녀석은, 제 몸의 밀랍을 녹여내는 태양과 같았다.‘대장!’하고 외치는 그의 말간 얼굴을 바라보면 눈이 부셨다.

그래서 끝까지 저항하지 못한 채 다시 어리석은 선택을 한 자신은 앞에 설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가업이라는 말은 구차한 변명이었다. 자신 안의 검은 공동이 그를 해칠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도망쳤다.

딸랑.

“대장? 거기서 뭐 하심까?”

딱히 대답을 기대하고 한 말이 아니었는 듯, 테토라는 얼굴 만면에 웃음을 걸고 그의 앞으로 왔다. 키류의 상념은 기분 좋게 깨졌다. 고개를 들어 테토라를 바라보니 작은 경이가 펼쳐졌다. 공기를 유영하듯 떠다니는 작은 먼지들은 서창을 너머 들어온 노을녘에 별처럼 반짝이고, 테토라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는 빛이 부딛혀 산란했다. 쿠로의 목에 걸려 있는 것과 꼭 같은 모양이다. 쿠로는 더 이상 밀랍의 안의 공허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비어있기 때문에 무엇이든 가득 찰 수 있다.

그리고 그곳은 이젠 온전히 빛이 자리했다.

후기 ~ 변명하지 말고 죽어 ~

안녕하세요. 앙스타 책으로는 처음 뵙습니다. 몽혼입니다.

이 책을…책이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네요. 이 잉크 찍힌 종이더미를 보고 계시다는 건 제가 마감엔 성공했고 양심을 팔았다는 뜻이겠네요. 모자란 글이지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흑흑흐…흑….

분명 12일에 탈고하고 교정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갈아엎었다 줄였다 늘였다 제트코스터를 탔습니다. 마감일을 꽉 채웠네요. 배운 게 많은 책이었습니다.(눈물 줄줄) 시놉을 처음부터 탄탄하게 짜자, 알았냐? 몽혼아? (뇌 : 뭐래) (손: 그러게 말이야)

스토리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은데, 이 스토리는 상당히 오래 묵혀둔 이야기였습니다. 입덕초에 짜 두었던 스토리로 중간에 지인분의 도움으로 사수 에피를 보게 되면서 캐해석이 많이 바뀌게 되어 한동안 방치했었던 소재였습니다. 이야기의 쿠로는 가업을 잇는다는 선택을 했지만, 지금 제 안의 쿠로는 사수를 거치고 나며 ‘하지 않는다’는 쪽에 가까워졌습니다. 스스로 납득되지 않는 부분을 안고 원고를 하는 게 조금 힘겨웠습니다만, 그래도 즐겁게 작업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테토라를 돕는 쿠로 에피나, 테토라의 미행이나, 쿠로의 과거회상이나 쿠로와 치아키의 이야기나… 여러 부분이 분량상의 이유로 빠지게 되었습니다. 기회가 되면 덜어낸 이야기도 써보고 싶네요.

제목은 사실 큰 의미가 없습니다. 제목을 정할 때 테토라의 파트, 쿠로의 파트 이렇게 두 개로 나뉘어져 있었고 제목을 암시할 만한 독백들이 쿠로 파트에 포진되어 있었는데 싹 빠지게 되면서 (말잇못). 그래서 의미 없는 제목 읽기 힘드시라고 표지에서 옆으로 눕혀 두었습니다. 하하하. 죄삼다.

도움을 주셨던 많은 분들 감사합니다. 특히 모브 단체와 모브캐릭터의 이름을 짓는데 도움을 주신 티밈님 감사합니다. 테츠쿠로의 맞관삽질을 지켜보며 스토리를 진행해 주던 치아키에게도 감사를 전합니다. 넌 내 히어로야. (눈물 줄줄)

우여곡절이 많았던 책이지만 정말 즐겁게 작업했습니다. 눈물 반 행복반이에요. 다른 책으로도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18.08.24 몽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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