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조이의 시선
선빈원에 들어간 지 올해로 벌써 세 해가 되어, 당당히 선임급 연구원이 된 하조이의 매일은 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휴일도 없이 일하는 건 퍽 고된 일이었지만 외지에서 일하고 계실 형님이나 가족과도 같은 활빈당 사람들이 고생했던 걸 생각하면 이깟 야근이야 큰일도 아니었다. 남들은 없어서 쓰지도 못한다는 연가가 한참 쌓인 것도 작은 일에 속했다. 못 쓴 연가는 급여로 돌려준다고 하니 손해보는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상사의 입장은 다른듯 했다.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연가를 빨리 소진하라고 귀에 딱지가 앉게 말을 했고, 결국 하조이는 5일이라는 제법 긴 시간의 휴가를 보내기로 했다.
일과 공부 외에는 별다른 취미가 없는 하조이로서는 휴가라고 해도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첫날은 걸판지게 늦잠을 잔 뒤 종로를 거닐다가 커피 하우스에 가서 커피 한잔이라도 즐기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막상 아침이 되자 그 결심이 무색하게 평소 출근하던 묘시에 눈이 떠졌다. 그간 선비원 생활을 하며 몸에 익은 생활 습관은 하루아침에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른 새벽부터 멀뚱하니 이부자리에 앉아있기 답답해 마당으로 나갔다. 어머니는 활빈당에 일이 있어 점심쯤 오시겠다 하셨는데 이른 새벽부터 자리를 비우셨는지 집안이 썰렁했다. 하늘을 보니 시간이 이르기도 했지만, 이상스럽게 어둑어둑했다.
‘어째…. 비가 오려나? 그래, 옳다구나. 어머니께서 고생하기 전에 마당에 널어놓은 잡동사니나 좀 치워 두어야겠다.’
이역에 나가 일하는 형님이 보내오는 돈이 적지 않았고 자신도 어느 정도 돈을 보태고 있었기에 가계는 예전처럼 곤궁하지 않았지만, 부모님은 반빗아치 하나 두지 않고 아직도 집 안의 모든 일을 손수 처리 하곤 하셨다. 하지만 정정하신 두 분이라도 나이가 드는 것을 속일 수는 없는 법이었다. 한 해, 한 해 지날수록 점점 집안일이 힘에 부치시는 게 눈에 보였다. 그래, 이럴 때야말로 형님이 외지에서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도록 부모님 곁에 있는 자신이 잘 봉양해야 했다. 마당 좀 정리하는 일 정도로 괜스레 결연해진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하조이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조이야!”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던데, 매번 까치도 모르도록 집에 돌아와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는 하조이의 형, 하태의였다. 양장 위에 두루마기를 멋들어지게 걸친 형님은 평소와 다르게 눈가리개를 하지 않고 맑고 투명한 눈으로 제 동생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형님! 어찌 기별도 없이 이리 오셨습니까?”
하조이는 만면에 화색을 띠고 한달음에 하태의에게 달려갔다. 조이는 그제야 제 형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하태의 뒤에는 짙푸른 창파오에 검은 코트를 걸친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중국인인가?’
사내의 키는 하태의와 비슷하거나 조금 작은 듯싶었는데 가슴팍이 떡 벌어진 게 여간 다부진 몸매가 아니었다. 고된 훈련을 통해 탄탄한 몸을 가지고 있는 제 형에 밀리지 않는, 아니, 그보다 더 실한 몸이었다. 몸뿐만이랴? 심지어 이 사내는 얼굴마저 훤칠하게 잘 생겼다.
본래부터 하조이는 사람의 생김새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미적 감각이 없어 미추에 관심이 없는 것이 그 첫 번째 이유기는 하겠지만, 아무래도 어렸을 적부터 저를 살뜰히 돌봐주었던 피붙이의 얼굴이 보통이 아닌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런 얼굴을 매양 보고 살았으니 이제는 어쩌다가 한성에서 내로라하는 미남들을 보는 일이 있어도, 제 형님의 얼굴을 떠올리기만 하면 별 만들어지다 만 시루떡 같은 자들이 미남임세 떠들어 댄다는 생각을 금치 못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사내는 달랐다.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얼굴의 한쪽 면을 가리고 있었지만, 짙은 눈썹 아래로 쭉 벋은 콧날과 날렵한 턱선이 어우러지며 시원시원하고 강단 있는 미남의 얼굴을 다 가리지는 못했다.
낯선 사내는 무려 제 형님과 나란히 서 있어도 그 외양이나 기세가 밀리지 않았다. 필시 범상치 않은 인물임이 틀림없었다.
“이분은…?”
대답은 사내에게서 나왔다.
“그랑플람 재단의 아시아지부 스카우터, 정티엔 이다.”
사내의 입에서 나온 건 매끄러운 조선어였다. 귀에 익은 단체 이름을 듣자 하조이의 눈이 번뜩 뜨였다.
“그랑플람이라면 ‘숭고한 길 재단’…. 그렇다면 필시 아버지를 뵈러 오신 것이겠지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러고 안채로 안내하려 앞장섰다. 두어 걸음을 걸었는데 태의가 따라오는 기색이 없자 하조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뒤를 돌아봐다. 하태의는 수려한 미간을 은은하게 찌푸린 채로 둘을 보고 있었다.
“공적인 일로 온 것이 아니니 그리 소개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겠습니다.”
하태의는 짐짓 나무라는 투로 사내에게 말을 했다. 말은 타박하는 듯했으나, 눈매가 풀려 사르르 웃는 표정의 제 형의 얼굴을 보자, 어째서인지 목뒤로 비가 오기 전의 습기를 품은 서늘한 바람이 훑고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이름과 직함은 그러하다만 기실 내가 오늘 이리 불쑥 오게 된 일과는 상관이 없다. 이 사람은 내 정인으로 혼약을 허락받기 위해 이리 왔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부모님을 뵈어야 하는데 어디 계시느냐?”
“……. 예?”
기절초풍할 만큼 충격적인 소식에 하조이는 반 박자 늦게 대답했다.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듯 하조이는 형님 뒷편의 남자와 형님을 번갈아 바라봤다. 다소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둘은 하조이에게 핀잔을 주지 않고 그가 대답하기를 기다렸다.
“…예? 아…그, 저…. 어, 어머니는 일이 있으셔서 잠시 외출중이시고 아버지께서는 안방에 계십니다.”
“알겠다.”
경애하는 형님은 언제나처럼 날랜 걸음으로 안채로 향했다. 그들이 마당에서 사라지기전, 하조이는 묵묵히 그 뒤를 따르는 사내와 눈이 한번 마주쳤다. 사내 역시 조금 당황하는 눈치였다.
저 멀리서 폭풍이 다가오는 듯했다.
2. 정티엔의 시선
하태의의 집은 마당을 감싸는 ‘ㄷ’자 형태의 한옥이었는데, 툇마루에 창호를 달아 복도처럼 사용하거나 흰색 페인트를 바른 시멘트로 벽을 만든 것을 보아 전통적인 한옥과는 다르게 한옥과 양옥의 형식이 절충된 형태인듯 했다. 툇마루의 창호를 열자 넓게 펼쳐진 대청이 보였다. 대청을 거실처럼 사용하는지, 낮지만 넓은 상과 방석이 놓여 있었다.
하랑을 제자로 들일 때 조선에 오기는 했지만 그때 보았던 집과는 천양지차로 다른 모습이었다. 태의는 오른쪽의 방으로 티엔을 안내하며 말했다.
“이곳은 사랑방이라 하는데 손님을 맞을 때 쓰는 방입니다. 서방의 손님방이나 서재와 비슷한 역할을 하지요. 이곳에서 쉬고 계시오. 아버지께 인사드리고 오겠소.”
티엔은 태의의 말대로 하는 대신 하조이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의문을 지체없이 입에 올렸다.
“혹, 가족에게 미리 말하지 않은 것인가?”
“…. 미안하오. 서간으로 전하는 것보다 이리하는 것이 조금 더 효과적이라 생각했습니다.”
“아니, 내게 미안할 일은 없다. 반대와 냉대는 각오한 바니까. 다만, 네가 가족을 아끼는 만큼 이런 방법이 좋지는 않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일전에 이야기했듯, 나는 우리 둘만의 관계로도 충분하니….”
“티엔.”
이미 합의가 끝난 이야기를 끌어오자 테이가 상심한 듯 티엔을 바라봤다.
“실수는 인정하지.”
“그럼 쉬고 계십시오.”
태의는 대청으로 나가 안방으로 향했다. 티엔은 그 모습을 잠시 보다 이내 자리에 앉았다. 사랑방은 광택이 없는 짙은 오동나무 가구로 꾸며져 소박하지만 기품이 흘렀다. 하씨 부부의 품성이 드러나는 듯했다. 사방탁자에는 여러 종류의 책이 뉘어져 있었는데, 의서는 벤 워렌의 책이고 능력자에 관한 책은 동생의 책일 듯 싶었다. 불현듯 태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동생은 책을 좋아하여 열감기를 앓을 때도 책을 읽지 못하는걸 가장 섭섭해할 정도였습니다. 열이 올라 타들어 가는 목소리로 형님 책을 읽어주세요 하고 사정하여 밤새 호롱불 밑에서 동생에게 책을 읽어 주었습니다. 책보다는 나가서 뛰노는 것을 좋아하는 나나 누이와는 성정이 다른 아이죠. 그대도 책에서 앎을 찾아내는 것을 좋아하니 어쩌면 조이와 잘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 가벼운 기침감기에 걸려 쿨럭이면서도, 새로 구한 무술 서적을 밤새 책을 읽던 자신을 보고 했던 이야기였다. 그때엔 이미 티엔과 태의의 관계를 부르는 이름이 동료에서 연인으로 바뀌어 있었던 시점이었다. 하지만 그때에도 태의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입에 담는 것을 조심했었다. 상대가 자신이 가져온 일지를 편집하여 여러 속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서 유독 기억에 남았던 말이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가족에 대해 추억할 일이 별달리 없는 티엔 이었기에 더 기억에 남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털어냈다. 인사만 드리겠다는 태의가 방에 돌아오는 일이 생각보다 늦다는 생각이 든 티엔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서성였다. 가슴이 갑갑해졌다. 계획도 예측도 없이 움직이는 이런 상황은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었다.
초조함을 달래기 위해 티엔은 사랑방 옆에 누마루의 문하나를 활짝 열었다. 눈을 감고 밖에서 들어오는 바람의 기운을 맞았다. 비 오기 전의 습기를 머금은 찬 바람이 얼굴에 닿자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천천히 눈을 뜨니 마당에 보랏빛 꽃이 만개한 오동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빗자루를 쥔 채로 넋이 나간채 기계적으로 마당의 돌길을 쓸고 있던 하조이와 눈이 마주쳤다. 조이는 화들짝 놀라 빗자루를 마당에 내팽개친 채 누마루 건너편의 방으로 들어갔다.
“하….”
좋지 않은 흐름이었다. 티엔 정은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3. 벤 워렌의 시선
아침부터 어둑하던 하늘은 기어이 오후가 되어서 비구름을 몰고 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와중에 외출을 나갔던 하유영이 집에 귀가하며 가족은 다 같이 밥상 앞에 앉았다.
하씨 가족에게 가족 식사는 꽤 중요한 일이었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더라도, 그러니까 가령 아이들을 은신처에 두고 사람을 구하러 가야 하는 날에도 아침 식사만은 같이했다. 유영이 잡아 온 꿩을 손질해 국으로 끓이고, 벤 워렌이 약초를 캐며 같이 캐온 산나물을 들기름에 무쳐 반찬으로 삼았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가족이 모두 한 상에 둘러앉아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시간은 늘 따뜻하고 즐거움으로 가득 찼다.
식사가 끝나면 도린이는 설거지했는데, 어린 태의는 누나를 돕겠다고 옆에서 기웃거리다 그릇을 깨곤 했다. 도린이가 그렇게 떠나고 난 뒤에 설거지는 태의의 몫이 되었는데, 조이가 다 자라지 않은 손으로 꼬물꼬물 설거지를 돕겠다 나서서 가족은 그제야 도린이를 생각하며 눈물짓지 않고 함께 웃을 수 있었다.
태의가 군역을 치른 뒤 함께 도성으로 올라온 뒤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더 이상 산에 살지 않아 꿩 대신 닭이 상에 올랐고, 직접 캐온 산나물이 아니라 장에서 사온 갖은 채소가 상에 올랐지만, 밥을 나누면서 서로를 향한 마음을 나누는 일은 바뀌지 않았다.
그런 가족 식사 자리가 평소와 다르게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다. 상 앞에 다섯 얼굴은 각기 다른 표정이었다. 상 위로 시선을 떨구고 있는 티엔, 그 옆에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어머니를 바라보는 하태의, 그리고 그런 태의를 냉랭히 쏘아보는 하유영 사이에서 벤 워렌과 하조이는 각각 걱정과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두 사람을 눈치를 보고 있었다.
무거운 침묵을 깬 것은 유영이었다.
“내 분명 네게 연인을 데려오겠다는 언질을 받았다마는 사내라는 말은 듣지 못했다.”
유영은 전에 없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벤 워렌은 유영의 말을 듣고 일전에 태의에게 받은 편지가 떠올랐다. 분명 [이쪽에서의 일은 순탄합니다. 곧 조선에 돌아갈 수 있을 듯 합니다. 일생을 함께하고픈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때 함께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내용이었다. 확실히, 사내다 여인이라 말 한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비록 내가 네 어릴 적에 해주지 못한 것도 많고, 살뜰히 너를 챙기지 못했기로서니 그래도 나는 집안의 어른이고 네 어머니다. 허락하지 않으면 연을 끊겠다니. 사내라는 것을 알았으면 내가 저어할까 싶어 이리 막무가내로 일을 진행하는 것이냐?”
갑자기 일어난 일이 황당하고, 태의의 소행이 조금은 괘씸할 수는 있지만 언제나 아이들의 행복을 바라왔던 유영이 이렇게까지 덮어놓고 화를 낼 줄은 몰랐기에 걱정이 앞섰다. 유영의 꾸짖음에 태의의 시선이 식탁 위로 떨어졌다.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안절부절못하던 벤 워렌이 조심스럽게 옆에 앉은 유영의 손을 잡아보니 손이 차갑게 식어있었다.
“…….”
“이 어미에 대해 그리 믿음이 없었단 말이냐.”
유영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자 태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강인하디 강인한 어머니의 눈에서 구슬 같은 눈물이 흘렀다.
“죄송합니다.”
“유영.”
“어머니.”
잠자코 앉아있던 조이도 충격을 받은 것은 마찬가지라 걱정스럽게 제 어미를 불렀다. 유영은 거칠게 눈가의 눈물을 닦아내곤 말을 이었다.
“책망하지 않으마. 네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는 내 알고 있다. 네가 순서를 그르칠 만큼 어떻게라도 이루고 싶은 인연일 테지. 너희 두 사람의 마음이 그리 확실하다니 차라리 든든하다."
조심스럽게 나온 허락의 말에 그제야 가슴 졸이던 벤 워렌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그래, 네 어머니 말이 맞다. 예전에 장 바티스트가 내가 조선에 남기로 했을 때 해준 말이 있었지. 누구나 자기 삶에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오고 그때엔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이기적으로 결정을 내려도 된다고. 여인이면 어떻고 사내면 어떻단 말이냐. 태의 네가 이리 장성하여 앞가림도 하고, 혼약하겠다 사람도 데려오다니 말이야. 언제 이리 다 컸느냐…. ”
지나간 세월이 떠올랐는지 벤 워렌은 왈칵 솟아오르는 눈물을 삼켰다. 촉촉이 젖은 눈가를 저고리 고름으로 닦으며 하유영은 티엔에게 말했다.
“사람이 왔는데 못난 꼴을 보였군. 미안하네.”
“아닙니다. 쉽지 않은 결정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묵묵히 앉아 있던 티엔은 조금 물에 젖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감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일이 적은 연인의 태도에 태의도 놀라 그를 바라봤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지만, 티엔은 태의의 시선을 보고 괜찮다는 듯 고개를 살짝 젓고는 하유영과 눈을 마주쳤다.
“그래, 부모님은 건재하시고?”
“아버지께선 어린 시절 가족을 떠나신 뒤 연락이 되지 않으시고, 어머님은 지금 모국에 계십니다.”
“자당께서 고생이 많으셨겠군. 그럼 혼약에 대해서는 말씀드렸는가?”
“간략히 일러두었습니다. 알겠다는 답변을 보내 주셔서 따로 찾아뵙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티엔의 답변에 유영의 얼굴에 얼핏 근심이 서렸다. 무어라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문 찰나, 옆에서 벤 워렌이 거들었다.
“거리가 거리다 보니 양가가 함께 만날 수는 없을지언정 자네들이라도 찾아뵈어야지 않겠는가. 근시일내에 꼭 다녀오도록 하게나.”
“….”
“예, 알겠습니다.”
대답을 머뭇거리는 티엔 대신 테이가 선수를 쳐 대답했다. 목소리 끝에는 옅은 웃음이 묻어 나왔다.
그제야 경직된 분위기가 조금씩 풀리며, 그제야 눈치만 보던 막내 조이가 조심스럽게 어떻게 서로 만나게 된 것인지 궁금한 것을 묻기 시작했다. 그 말을 기점으로 가족들은 밀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마치 처음부터 티엔이 가족이었던 것처럼. 아주 예전부터 그랬듯이.
그 사이에서 티엔은, 어쩐지 쑥스러운 기분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조금 식어 미지근해진 국은 오히려 입에 딱 맞았다. 급하지 않게 꼭꼭 씹어 식사하는 티엔을 보며 유영은 살포시 웃었다. 벤 워렌이 사랑해 마지않는 그 곱게 지는 눈가의 주름이었다.
떠들썩한 식사가 끝나고, 태의와 조이가 상을 치우고 유영이 차와 과일을 준비해오는 사이, 대청에는 티엔과 벤 워렌만이 남았다. 유리가 끼워진 창호 너머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잔잔한 빗소리가 둘 사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조선의 집은 조경을 하지 않는 마당을 두는 편이지만, 태의의 집은 바닥에는 옅은 잔디를 깔고 마당의 가장자리에는 색색의 꽃과 나무를 심어 마치 프랑스 시골 마을의 작은 정원 같았다. 벤 워렌은 물에 젖어 더 싱그럽게 빛나는 정원의 녹음을 바라봤다.
“프랑스에서 살았을 때보다 이제 조선에서 산 날이 길어서 이제 조선이 더 고향 같네. 자네에게도 이 집이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어. 태의를 잘 부탁하네.”
“예.”
벤 워렌은 티엔의 손을 잡고 얼굴을 마주 봤다. 나이를 먹어 검버섯이 피고 주름이 진 자신의 손 안에 거칠고 단단한 손이 잡혔다. 그 손은 따스했고, 제게 대답을 건네는 얼굴이 맑았다. 그 언젠가 태의에게 안대를 씌워주었던 날을 떠올렸다. 태의는 스스로 눈가리개를 벗고 마주할 사람을 찾아 낸 것이다.
트위터에 썼던 썰 태의네 집에 결혼 허락 받으러 가는 테이티엔을 글로 뾰로롱.
쓰다가 빠진 부분인데, 태의가 벤 워렌이랑 대화 마치고 사랑방으로 건너가자마자 조이가 안방으로 헐레벌떡 들어가서 저..저분이 형님의 나,남자친구라고 합니다 < 라는 부분이 있는데 내 생각에도 너무 귀여운듯. 사실 1930년대에 남자친구라는 단어를 썼을까 싶은데(남자친구보다는 애인/연인이 좀 더 많이 쓰였겠죠) 형님의 남자친구 라는 단어의 파괴력이 너무 좋아서 못쓴게 아쉽네요.
기력이 있으면 다음엔 티엔네 집에 결혼인사 드리러 가는 테이티엔 쓰게될듯.